발 묶이자 해외 큰손 '싹쓸이'…'생태계 붕괴' 공포 덮친 곳

발 묶이자 해외 큰손 '싹쓸이'…'생태계 붕괴' 공포 덮친 곳
국내 인수합병(M&A) 시장의 주도권이 글로벌 사모펀드(PEF)로 넘어갔다. 원화 약세에 ‘홈플러스 사태’가 겹치면서 국내 PEF 활동이 위축된 영향이다. 20년 넘게 키운 토종 PEF 생태계가 붕괴 위기에 처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미지 크게보기 5일 한국경제신문 마켓인사이트 상반기 리그테이블에 따르면 PEF가 인수한 거래 규모 5000억원 이상 국내 기업 가운데 80.3%는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와 블랙스톤 등 글로벌 PEF 차지였다. 2024년까지는 국내 PEF 비중이 70%를 웃돌았지만 지난해를 기점으로 상황이 급변했다.

시장 구도가 바뀐 원인은 복합적이다. 원화 약세 여파로 달러 자금을 앞세운 해외 PEF의 베팅을 국내 업체들이 당해내지 못하고 있다. 국민연금 등 국내 주요 투자자(LP)가 출자를 꺼리는 것도 토종 PEF 생태계에 악영향을 줬다. 고금리도 부담 요인이다. 인수합병(M&A)에 필요한 자금을 차입할 때 PEF가 부담해야 할 금융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어서다. PEF가 투자할 수 있는 업종군이 좁아진다는 분석도 나온다. 홈플러스(MBK파트너스 인수) 사태와 런던베이글뮤지엄(JKL파트너스) 과로사 논란 등이 겹쳐 소비재기업 인수를 기피하는 PEF가 늘어났다. 노란봉투법과 중대재해처벌법은 건설·제조업체 M&A를 위축시켰다.

정부는 2005년 토종 PEF 육성 법안을 제정했다. 하지만 제도가 도입된 지 20년이 넘도록 여전히 ‘먹튀 자본’이라는 프레임이 공고해 해외 PEF가 반사이익을 보고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올해 국내 PEF 빅딜 비중 20%…2~3년전만해도 70%에 육박
MBK, 홈플러스 수습에 매진…다른 업체도 신규 딜 '몸사리기'

지난 6월 고(故) 정휘동 청호그룹 회장 유족은 국내 정수기 렌털기업 청호나이스의 경영권을 글로벌 사모펀드(PEF) 운용사 칼라일그룹에 넘겼다. 정 회장 유족 측은 3000억원대에 달하는 상속세를 마련하기 위해 경영권을 PEF에 매각했다. 국내 대형 PEF가 먼저 유족과 접촉하며 인수 의사를 내비쳤으나 자금력에서 글로벌 PEF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대기업 딜도 해외 PEF가 독식

환율 급등과 중복상장 금지 정책, 주가 변동성 등으로 국내 인수합병(M&A) 시장이 정체된 가운데 글로벌 PEF가 막강한 달러 실탄과 해외 판로를 앞세워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5일 한국경제신문 마켓인사이트가 집계한 올해 상반기 리그테이블에 따르면 대형 글로벌 PEF가 주요 딜을 ‘싹쓸이’하는 현상이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거래 규모가 5000억원 이상인 국내 기업의 바이아웃 딜(경영권 거래) 가운데 PEF가 인수자인 거래를 전수조사한 결과 올해 7월까지 전체 거래액 대비 해외 PEF가 차지한 비중은 80.3%에 달했다. 국내 PEF 비중은 19.7%로 작년(28.1%)보다 더 낮아졌다.

2~3년 전만 해도 전체 거래액 중 국내 PEF 비중은 70% 이상이었다. MBK파트너스의 메디트·오스템임플란트 인수, 한앤컴퍼니의 SK스페셜티·루트로닉 인수, IMM PE의 에코비트 인수 등이 대표적인 ‘빅딜’이었다. 변곡점은 원화 약세가 두드러지고, 홈플러스 사태가 격화한 지난해다. 국내 PEF의 움직임이 둔화한 사이 글로벌 투자회사가 시장을 장악했다.

SK그룹은 SK이터닉스와 계열사 신재생에너지 사업부 분리매각(카브아웃) 파트너로 KKR을 택했다. 롯데렌탈 매각을 추진하고 있는 롯데그룹은 미국계 PEF TPG와 협상을 진행 중이다. 지난달 대웅제약 오너인 윤재승 최고비전책임자(CVO) 측은 글로벌 척추 치료제 1위 기업인 시지바이오의 인수 우선협상대상자로 국내 PEF인 IMM PE를 선정하고 협상을 벌였으나 조건이 맞지 않아 최종 결렬됐다. 현재 우선협상대상자 지위는 윤 CVO 측에 유리한 조건을 내세운 미국계 TA어소시에이츠로 넘어갔다.

◇고용과 기술 유출 등 규제 사각지대

MBK파트너스, 한앤컴퍼니 등 조(兆)단위 펀드를 굴리는 대형 운용사가 신규 인수를 중단한 것도 시장 구도가 바뀐 배경으로 거론된다. MBK는 홈플러스 사태 수습에 매진하느라 여력이 없었고 한앤컴퍼니 역시 한동안 포트폴리오 회수와 내부 정비에 집중했다.

국회 상임위원회 출석과 구속영장 실질심사, 사재 출연 압박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태를 본 PEF들은 ‘당분간 여론의 주목을 받는 딜은 피하겠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한 PEF 대표는 “PEF가 인수하려고 하면 노조와 지역사회에선 ‘투기자본’의 먹잇감으로 버림받는다는 인식이 더욱 강해졌다”며 “출자자(LP)인 국내 연기금·공제회 사무실 앞에서까지 노조가 시위하는 걸 보고 아연실색했다”고 말했다.

토종 투자사가 위축된 틈을 타 글로벌 PEF는 거래 규모 5000억원 안팎의 중견기업 딜에도 뛰어들고 있다. 지난해 블랙스톤의 준오헤어 인수, KKR의 삼화 인수, 올초 베인캐피탈의 에코마케팅 인수 모두 예전이라면 해외 PEF가 굳이 참여하지 않았을 규모의 거래다.

PEF는 기업 M&A와 사업 재편, 구조조정을 활성화하는 역할을 한다. 자본을 효율적으로 재배치하고 산업계 경쟁력을 단기간에 높여주는 등 순기능이 적지 않다. 한 대형 PEF 대표는 “해외 PEF는 규제 사각지대에 있기 때문에 국내 고용, 산업 기술 유출 방지 등에서 국익에 반하는 행보를 보일 수 있다”며 “지금 같은 여건에선 정부의 산업 정책이 더 이상 먹혀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송은경/최다은 기자 norae@hankyung.com